전시

참여작가

윤석남 YUN Suknam

  •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3-2008, 2025, 나무에 아크릴릭, 가변 크기, 1,025개 중 367개.

한국 여성미술을 대표하는 윤석남은 1939년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태어나 마흔이 넘어서야 작가로 데뷔했다. 198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초기 여성주의 작가들과 단체전에 참여하며 여성의 목소리를 주체적으로 예술에 담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모성을 새롭게 해석하고 어머니 세대의 삶을 되짚으며 억압의 서사 속에서 또 다른 여성사를 구축해 나갔다. 평생에 걸쳐 여성의 내면과 현실을 깊이 있게 파고든 그의 작업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흐름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윤석남의 작업은 한국 페미니즘 미술 그중에서도 생태여성주의의 맥락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번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대규모 조각 설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는 유기견 1,025마리를 돌보는 이애신 할머니의 삶에서 출발했다. 작가는 신문에서 이애신 할머니의 사연을 읽고 직접 ‘애신의 집’을 찾았다. 그는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개를 버리는 현실에 충격을 받는 한편,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홀로 돌보는 할머니의 헌신에 강한 인상과 존경을 품었다. 이 경험은 여성의 이야기에 주목해 온 그에게 유기견을 사회적 약자이자 여성의 또 다른 표상으로 인식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년에 걸쳐 완성한 이 대규모 작품은 모성·돌봄·인간애를 축으로 생명에 대한 연민과 연대를 실천적으로 드러냈다.

생태여성주의는 1970년대 서구에서 출발한 사상적·실천적 운동이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 중심주의와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199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이론보다는 현실의 실천을 중시한다는 특징이 있다. 윤석남의 작업은 여성과 약자에 대한 연대를 바탕으로 인간 중심 질서와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한다. 그의 예술은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지향하고 이를 작품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보호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와 맺는 관계 속에서 인간이 취해야 하는 태도를 질문해온 작가는 생태여성주의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과 연결된다. 작품에서도 이러한 방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윤석남은 이 유기견 조각들을 완성하기 위해 나무의 재질과 특성을 최대한 살려가며 다양한 형상으로 자르고 다듬었다. 개의 형태를 드로잉한 뒤 표면을 깨끗이 갈고 밑 칠을 한 다음 다시 한 번 표면을 정리하고 그 위에 아크릴물감과 먹으로 그리고 채색하는 방식으로 1,025점의 나무 조각을 완성했다. 이 과정은 회화의 전통 방식을 조각과 설치에 접목한 것이다. 열두 번의 공정을 거치는 이 과정에서 작가는 버려지고 비참하게 죽어간 생명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애도했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떠올리며 자연과 상생을 이루는 삶을 기원했다. 윤석남의 손을 거쳐 새 생명을 얻은 유기견 조각들은 미술관 안팎에서 다양한 규모로 전시되며 전시 환경과 맥락에 따라 유기적으로 재배치되고 변화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생명에 대한 인식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확장시켰다.

윤석남(b.1939)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여성의 삶과 현실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통해 40여 년간 예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해 1982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초기에는 어머니와 모성에 관한 자전적 서사를 바탕으로 작업했다. 이후 정체성, 생명과 돌봄, 자연, 여성사 등으로 주제를 확장했으며, 최근에는 역사 속 여성 인물을 재해석하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윤석남은 유기견, 여성 돌봄, 페미니즘 등 다양한 이슈를 담은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를 현재까지 야외 중 가장 큰 규모로 설치하며 강릉대도호부 관아 동헌 앞마당을 작품의 무대로 삼았다. 나무 합판으로 제작한 강아지 형상의 조각 수백 점이 마당을 채우며 돌봄 노동과 유기견의 존재를 강렬하게 드러냈다.

작가의 주요 개인전으로는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학고재 갤러리, 2021),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표현》(도쿠시마시현립근대미술관, 도쿠시마, 2016), 《SeMA Green: 윤석남 ♥ 심장》(서울시립미술관, 2015) 등이 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내게 다정한 사람》(인천아트플랫폼, 2024), 《신/여성의 탄생》(자하미술관, 2023), 제3회 제주비엔날레《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2022),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덕수궁, 2021) 등이 있다. 작가는 제23회 이인성 미술상(2022), 국민훈장 모란장(2019), 제29회 김세중 조각상(2015), 국무총리상(1997), 제8회 이중섭 미술상(1996) 등을 수상했다.

웹사이트: http://yunsuk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