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강원 강릉시 한 카페에서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기자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2025.3.14) 사진=연합뉴스“도깨비는 본래 사람을 좋아해요. 그래서 늘 우리 곁을 맴돌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인간의 주관主觀이 흔들리는 순간, 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이 주최·주관하는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25이 지난 14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총 38일간의 여정에 들어갔다.
2023년 이래 강릉이라는 지역성과 현대 예술을 연결해 왔다.
올해 페스티벌의 주제는 ‘에시자, 오시자Esiza, Osiza’. 이는 강릉단오굿에서 악사가 쓰는 구음에서 차용한 말로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부른다’는 뜻을 품고 있다.
재단은 이 표현에 환대와 교감의 개념을 추가, 공동체 및 개인의 서사가 서로 교차하는 장으로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
전시는 강릉역을 포함해 지역의 문화·역사적 장소에서 펼쳐지며, 워크숍과 시민 참여형 프로그램 등도 함께 운영된다.
◆도깨비에게서 배우는 삶의 태도
이 중 서다솜 작가는 강원 강릉시 남문동에 위치한 일곱칸짜리 여관에서 워크숍 ‘있는 없는싱스 논네글리저블·Things Non-negligible’을 열고 있다.
작가가 2019년부터 이어 온 ‘프랙티스 메이크스 프랙티스Practice Makes Practice’ 프로젝트의 연장선이다.
지난 15일, 첫 워크숍을 앞두고 만난 서 작가는 모두를 환대한다는 의미에서 본 작업과 페스티벌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도깨비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재단이 제공한 리서치 자료가 계기였다고 덧붙인다.
초동 워크숍에서는 ‘마치 도깨비와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일곱칸짜리 여관에 초대해 일종의 ‘도깨비 모임’을 열었다.
이후 매회 약 6명의 관람객이 참여하는 정식 워크숍이 매주 금·토·일요일 총 17회차로 진행된다.
도깨비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를 전해 듣고, 작가가 재해석한 ‘도깨비가 좋아하는 음식’을 나눠 먹는 시간을 갖는다.
서다솜, ‘있는 없는’ 일곱칸짜리 여관 워크숍 전경. 사진=파마리서치문화재단서 작가는 “핵심은 도깨비에게 바로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함이다. 도깨비를 알아 가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과연 어떻게 사는 게 응당한지에 대한 기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도깨비를 직접 만날 수 없으니, 대신 이에 상응하는 사람을 초대해 다양한 삶의 지혜를 구하는 과정을 초동 작업에 담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답을 얻는 것이 꼭 목표가 아님을 특별히 강조했다.
더는 ‘어떻게 하는 게 잘 사는 것인가’를 외면 하지 말고, 그 중요성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무시해서는 안 되는’이란 뜻의 영제 ‘싱스 논네글리저블’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사실 진짜 중요한 거잖아요. 문득 우리는 그걸 지나치면서 산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이 아니더라도 좋아요. 제가 만든 음식을 매개로 언젠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도깨비가 돼지고기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더라. 다들 한 번씩 맛보고, 내가 제안하는 메시지 역시 잘 가닿았으면 좋겠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낯익은 공간에 낯선 감각을 입히다
올해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의 중심 무대는 강릉대도호부 관아다.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앙 관리가 머물렀던 이곳은 국보로 지정된 객사문과 보물 칠사당이 있는 국가유산이다.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강릉대도호부 관아 전시 전경. (2025.3.14) 사진=연합뉴스이 장소에서는 안민옥 작가(b.1991)의 ‘럭키 헤르츠Lucky Hertz’ 연작(2025)을 비롯, 홍이현숙 작가(b.1958)의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강릉’(2025), 흐라이르 사르키시안 작가(b.1973)의 ‘스위트 앤드 사우어Sweet & Sour’(2021-2022), 윤석남 작가(b.1939)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3-2008, 2025)가 전시된다.
한편, 강릉역과 창포다리처럼 일상적 공간도 예술의 장으로 재해석된다.
현대적 접근성을 상징하는 강릉역과 전통적 연결성을 품은 창포다리에서는 강릉 출생이고 서울에서 오랜 시간 거주한 김재현 작가(b.1994)의 ‘서클 트래킹Circle Tracking’(2025)과 ‘플로어 매핑Floor Mapping’(2025)이 각각 관람객을 맞는다.
유휴 공간도 전시 장소로 탈바꿈했다. 강릉 최초의 병원 중 하나인 옛 함외과의원은 ‘치유와 회복’을 주제로 재해석되며, 이해민선(b.1977) 작가와 키와림김기훈(b.1990)·김들림(b.1990) 작가의 작품이 소개된다.
키와림은 매주 목요일 워크숍 ‘사물들Les choses’도 연다.
정연두, ‘신커페이션 #5’ 옥천동 웨어하우스 전시 전경. 사진=파마리서치문화재단양곡 창고로 쓰이던 옥천동 웨어하우스는 제2회 페스티벌에 이어 다시 또 전시장으로 활용되며, 정연두 작가(b.1969)의 ‘신커페이션 #5Syncopation #5’(2025)가 설치된다. 작가는 강릉단오제에서 마주한 풍경을 바탕으로, 인간의 염원과 자연의 힘이 교차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기존 문화 공간도 예술로 채워진다. 작은공연장 단에서는 이양희 작가(b.1976)의 퍼포먼스 ‘이양희 산조LEEYANGHEE SANJO’(2025)와 영상 작업 ‘이양희 입춤LEEYANGHEE IPCHUM’(2025)이 주말마다 펼쳐지고, 매주 금요일에는 워크숍 ‘매스MASS’가 진행된다.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는 호추니엔(b.1976)의 ‘변신술사Shapeshifters’(2025)가 상영된다.
◆예술로 지역 살리는 기업
전시에만 머무르지 않고 기타 프로그램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도 특징이다.
‘시티도슨트 & 시티가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주요 전시장과 역사 유적지를 함께 둘러볼 수 있고, 강원지방기상청과 협력해 어린이 대상 특별 도슨트도 선보인다.
재단의 어린이·청소년 교육 프로그램인 ‘뱀, 물, 새의 학교’도 트라이얼 형식으로 첫선을 보인다.
김재현, ‘서클 트래킹’ 강릉역 전시 전경. 사진=파마리서치문화재단지역 기반 작가인 김재현·안민옥·키와림 작가이상 가나다순에 대한 지원도 눈여겨볼 점이다.
지난 14일 열린 개막식에서 박필현 재단 이사장은 “강릉이 미술과 자연과 역사와 사람이 함께 어울리는 특별한 무대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단오제가 몇백 년간 이어져 온 것처럼 우리 페스티벌도 그런 영속성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현재 재단은 시군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페스티벌을 자체 운영 중이다.
이같은 활동은 강릉 향토 기업인 파마리서치의 몫이 크다. 박 이사장은 한국화가이자 창업주 정상수 회장의 배우자다.
이사장에 따르면 재단은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을 “예술을 통한 지역 재생 프로그램”으로 칭하고 있다.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이 아닌, 역사와 문화를 발굴해 시민에게 자부심을 돌려주는 것 또한 도시 재생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관, 시민, 기업이 균형 이뤄야”
전문가들은 민간 재단이 주도하는 예술 행사가 인구 20만명 남짓인 강릉에 어떤 파급력을 미칠지를 주목하고 있다.
구자훈 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교수는 해외 도시 사례를 들어 문화·예술이 도시의 표정을 바꾼다는 점에 주목했다.
구 교수는 “문화와 예술을 활용한 전략은 도시 재생에 상당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전제했다. 영국 리버풀이 음악과 영화를 중심으로 원도심을 활성화한 사례와 함께, 일본 나오시마가 버려진 섬에서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문화·예술의 섬으로 재탄생한 사례도 언급했다.
버려진 가옥을 전시관으로 바꾸고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지역 사회와 협력하는 모델은 국내에서도 충분히 벤치마킹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라는 무대를 ‘사람과 이야기가 살아 있는 문화 공간’으로 바꾸는 데 예술이 기여할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하동원 한국융합관광연구소장은 예술 행사가 도시 브랜드 형성의 핵심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 소장은 “도시가 쇠퇴하는 주요 지표는 인구이며, 강릉은 인구 감소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며 “문화·예술을 통해 새로운 유입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원도심은 점점 활력을 잃고 고령화만 가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스페인 빌바오가 구겐하임미술관 등을 통해 쇠퇴한 항구 도시에서 세계적 관광 도시로 탈바꿈한 사례, 일본 가나자와가 유휴 시설 등을 활용한 예술 프로젝트로 지역 활력을 회복한 사례를 들며, 도시 브랜드를 바꾸는 데 예술이 얼마나 실질적인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강조했다.
또한 지속 가능한 재생을 위한 조건으로 ▲주민 참여 ▲민관 협력 ▲화제성이라는 세 가지 축을 짚었다. 이어 “문화 행사를 통해 생겨나는 생활 인구가 결국 정주 인구로 이어지는 흐름을 만들어 내야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고 밝혔다.
이양희, ‘이양희 산조’ 작은공연장 단 퍼포먼스 전경. 사진=파마리서치문화재단민간이 아닌 공공이 먼저 예술의 무게를 책임져야 한다는 직설적인 목소리도 있다.
신승철 국립강릉원주대학교 교수는 지역 출신 기업인의 사회 공헌이라는 측면에서 행사를 매우 의미 있게 바라보고 있다면서도, 그 지속 가능성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냉정하게 짚었다.
신 교수는 “강원트리엔날레가 폐지된 지금, 이 페스티벌은 사실상 강원도에서 유일하게 남은 현대 미술 행사”라며 “현대 미술은 지역의 문화 의식과 수준을 반영하는 바로미터인데, 지금처럼 관이 뒷짐을 지고 민간에만 맡겨 둘 사안은 아니다”고 말했다.
작가의 수준과 기획 밀도는 높지만, 전시가 여러 곳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편의성 부족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더불어 행사의 성패는 지역의 의식 수준과 관심에 달려 있기 때문에 ‘미술 문화 확산’이라는 본질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가리켰다. 강릉 시민이 대상인 전시 투어와 현대 미술 강연 프로그램이 보완돼야 한다고 추천했다.
특히 “관의 적극적인 협력과 시민의 관심, 기업의 책임감과 지속적 후원이 균형을 이룰 때만이 이 행사가 도시의 문화적 생명력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은 단지 성공한 기획에 머물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문화적 구조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간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은 강릉의 역사와 삶에 밀착된 기획을 보여 주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예술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문화적 기억의 형성과 전달이라는 점에서 지역 미술 행사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광주비엔날레(민주화 운동), 요코하마트리엔날레와 리버풀비엔날레(산업 구조 변화로 인한 도시 재생)처럼,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이라는 것은 결국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적 기억의 형성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신 교수의 말이다.
파이낸셜투데이 김영재 기자 culture@f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