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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세계일보 250325] 천년의 공간이 품은 현대 미술 ··· 역사·개인의 서사를 잇다2025-03-27 10:2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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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살펴보기

모든 존재 초대 뜻 ‘에시자, 오시자’ 문패
강릉대도호부 관아 등 명소 8곳서 전시
영상설치작가 사르키시안 작품 ‘스윗 ···’
행위예술가 홍이현숙 퍼포먼스 영상작
표면 뒤 의미 찾기·공간 창출 등 눈길

강릉지역 작가 안민옥 사운드 작업 펼쳐
지역민들 경험·이야기 모아 삶을 구체화
윤석남 ‘1025 ··· ’ 등 4월 20일까지 진행

문을 밀고 어두운 공간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 정면에 설치된 3개의 모니터가 먼저 반겨준다. 가운데 모니터는 산 정상에 눌러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노인의 뒷모습을 잡고 있다. 왼쪽 모니터에선 튀르키예 국경 마을에서 찍은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쪽 모니터는 어둠 속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의 얼굴을 투영한다.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GIAF 25에는 1025개 중 367개 작품만 설치됐다.

노인은 영상설치미술 작가 흐라이르 사르키시안의 아버지다. 작가는 아르메니아계 시리아인으로, 영국 런던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겪은 뒤 시리아로 추방됐다. 아버지와 자신은 2011년부터 13년 동안 지속된 시리아 내전의 몸살을 앓았다.   

 

사르키시안은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의 기억과 단절된 역사를 사진과 영상으로 탐구한다. 인간의 존재가 느껴지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 황량한 풍경과 장소를 자주 포착한다.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대비를 통해 관객이 표면 뒤에 숨겨진 더 깊은 의미를 이해하고 더 큰 역사적 또는 사회적 서사를 재평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작업의 핵심이다.

 

흐라이르 사르키시안, ‘Sweet & Sour’


한국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 ‘Sweet and Sour(달콤하고 시큼한)’는 조상의 고향을 기록한 영상과 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을 교차시키며, 정체성과 유산이 변형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3개 화면은 아버지, 풍경, 침묵의 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관람객은 단절된 기억과 지리적 거리에서 비롯된 감정을 체험하면서 역사와 개인 서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놀랍게도 작품이 설치, 상영되는 곳은 1000년을 지켜온 관청 강릉대도호부 관아 안에 있는 문화유산 ‘전대청(殿大廳)’이다. 관아의 주요 건축물 중 하나인 국보 ‘임영관 삼문’은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으로 지어진 강릉 객사(客舍)의 정문으로, 객사는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이란 현판은 2006년 복원하면서 원래 자리인 전대청에 옮겨 걸어 친필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고려 건축물 중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유산이다. 이를 현대 미술과 접목시켜 공간의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 25)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에시자, 오시자’를 문패로 내건 GIAF 25가 관아를 포함한 강릉시내 명소 8곳에서 4월20일까지 펼쳐진다. 강릉단오굿 악사들의 구음에서 유래한 ‘에시자, 오시자’는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를 초대한다’는 의미다.

 

이양희, ‘이양희 산조’

행위예술가 홍이현숙의 퍼포먼스 영상작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강릉’도 삼문 안에 있는 또다른 건물 중대청에서 상영되고 있다. 홍이현숙은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존재하고 넘나드는 공간창출을 목표로 한다.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지만 영상 설치, 퍼포먼스, 사진 등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해 작업한다.

 

관아 여기저기에 설치된 안민옥의 사운드 작업도 눈에 띈다. 강릉단오제 소리를 채집했다. GIAF 25가 공모를 통해 선정한 강원지역 기반 작가다. 2020년 벨기에에서 귀국 후, 전국 35개 정자에 관한 책 ‘홀로 선 자들의 역사’를 계기로 강원도에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변 환경에서 포착한 다양한 소리를 매개체로, 서로 다른 존재 사이 관계를 관찰하는 사운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지역 주민들의 경험과 사소한 이야기 등을 모아 이들의 삶을 더욱 구체적으로 들여다본다.

 

관아의 동헌 옆 마당은 367마리 개가 차지했다. 윤석남의 작품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중 일부가 배치된 것이다. 윤석남은 여성 서사와 돌봄의 가치를 탐구하며 사회적 약자에 주목해 왔다. ‘1025: 사람과 사람 없이’는 버려진 개들을 돌본 이애신 할머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나무조각에 1025마리의 개를 그려낸 작품이다. 마당을 가득 채운 개들은 관람객을 응시하며 돌봄과 연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홍이현숙,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강릉’

소극장 단으로 걸음을 옮기면 춤꾼 이양희의 산조와 입춤을 감상할 수 있다. 양팔 벌렸다 한 손 올리고 가늘게 쓸어내리는가 하면, 잰걸음으로 째고 나가더니 급회전 후 끊는 동작과 과감한 속도로 교란한다. 고개는 좌로 빼꼼, 전통무의 온갖 기교를 부리면서도 결코 식상함을 보이지 않는다. 리듬이 빨라지고 현대풍 비트가 나오면 단단한 종아리 근육까지 내보이며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어느 순간 객석의 눈길과 마음을 앗아가 버린다. 

 

“주르르르 돌아서 감고, 시선. 밀고 땡기고 그대로 돌아서 시선. 발끝까지 주르르르 허리 손. 땡기고 밀고 감아서 숙이고 감아서 딴따따, 위로 감고 주르르르…”  

 

퍼포먼스와 영상작업이 결합된 작업은 한국 신무용에서 파생된 산조와 입춤을 재구성하며, 정형화된 춤의 틀을 벗어난 끝에 마침내 춤의 심미적 가치를 확장한다. 한국 춤의 영역을 새롭게 인식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형태·형식의 제약, 소멸한 무형과 변질된 원형의 경계를 바로 보고 자신의 고유형을 진취적으로 확립하는 작업이다.

 

김재현, 강릉역에 내걸린 ‘써클 트래킹‘

싱가포르 작가 호추니엔은 다큐멘터리에서 판타지까지 아우르며 아카이브 이미지, 애니메이션, 영화 등을 활용해 몰입적이면서도 극적인 영상작품을 소개한다. 홍콩 배우 량차오웨이(양조위)가 출연한 영화들을 짜깁기해 그를 스파이로 만든 ‘이름 없음’ 등 기존 작품 다섯 편을 옴니버스 형태로 편집한 ‘변신술사(Shapeshifters)’를 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상영한다. ‘유령 작가’, ‘요괴’, ‘스파이’ 같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며 아시아의 근대성을 이야기한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재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재현은 청포다리와 강릉역에서 페스티벌 장소들을 하나의 시선으로 연결하는 작업 ‘플로어 맵핑’을 전시한다. 문화공간으로 재생한 옛 함외과의원과 옥천동 웨어하우스도 전시공간으로 활용됐다. 옛 함외과의원은 이해민선, 키와림의 작품을 진열한 채 ‘치유와 회복’의 공간 구실을 한다. 과거 양곡 창고였던 옥천동 웨어하우스는 정연두 작가의 영상 설치작품을 두루 품는다.

 

서다솜, ‘있는 없는’

1957년에 지어진 ‘일곱칸짜리 여관’은 옛 한옥을 개조한 공간이다. 작가 서다솜은 여기서 신작 ‘있는 없는’을 공개하고 워크숍도 함께 연다. ‘도깨비’를 중심으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 이들의 습성과 삶의 태도를 조명한다.

 

GIAF는 강릉 기반의 기업 문화재단이 주최하는 미술제라서 더욱 성공적인 안착을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 미술제가 지방정부 예산 배정에 따라 출렁거리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피부노화 개선 의료 제품 리쥬란으로 유명한 바이오제약사 파마리서치가 든든한 배경이다. 공공기관 주도가 아닌 민간에서 출발해 자리매김하는 좋은 사례다.


강릉=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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