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문화·예술에 자원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국가 경쟁력과 사회에 이바지하는 활동의 총칭인 메세나Mecenat. 그 어원은 로마 제국의 정치인이자 후원자였던 가이우스 클리니우스 마이케나스Gaius Cilnius Maecenas입니다. 파이낸셜투데이가 이 마이케나스에 빗대 기업과 문화·예술의 상호 보완적 협력 관계인 상생과 후원을 직접 취재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문화·예술은 평범한 일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며,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합니다.”
박필현 파마리서치문화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재생의학 전문 기업 파마리서치가 지난 2018년 설립한 비영리 단체다. 현재 창업주 정상수 회장의 부인이자 한국화가로 활동 중인 박 이사장이 재단을 이끌고 있다.
그는 “설립 초기에는 장학 사업과 복지 지원 등 전통적인 사회 공헌 활동이 중심이었다”며 “향토 기업인 파마리서치가 강릉 시민과 더욱 직접적으로 소통할 방안을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강릉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한 예술 활동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이사장의 말처럼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파마리서치의 핵심 가치인 ‘재생’을 계승하며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기업과 지역 사회의 상생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강릉에 문화·예술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 지역을 문화 도시로 알리기 위해 국내 최초의 사기업 주관 지역 예술제인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이하 GIAF을 기획했다.
이 행사는 강릉의 고유한 이야기를 발굴하고 지역 곳곳의 의미 있는 장소를 선정해 국내외 작가를 초청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2022년 제1회 행사를 시작으로 2023년 제2회 GIAF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입지를 다졌다.
◆파마리서치와 예술적 시너지로 확장된 강릉
파마리서치와 강릉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동해안 연어를 활용한 바이오·제약 기업으로서 강릉에 본사를 두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정 회장의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시에 강릉은 문향과 예향의 고장으로, 신사임당, 율곡 이이, 허난설헌, 허균 같은 역사적 인물을 배출한 지역이기도 하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오늘날에도 강릉의 정체성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이에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강릉의 역사와 자연을 현대 미술을 통해 재해석하며 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도시를 감각적으로 탐구하는 국제 행사를 열고 있다.
GIAF는 기존의 일차원적 도시 문화 사업과 고정된 장소에서만 열리는 기타 예술 축제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도시 곳곳의 풍경과 순간을 연결하고, 지역 커뮤니티와 협력하는 방식으로 그 독창성을 한층 강화했다.
2022년 11월 4일부터 12월 4일까지 31일간 열린 제1회 GIAF는 ‘강/릉/연/구江陵連口’라는 이름 아래 개최됐다. 15명의 국내외 작가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협업해 강릉을 주제로 한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내며 페스티벌의 기초를 탄탄히 다졌다.
이어 2023년 9월 26일부터 10월 29일까지 34일간 열린 제2회 GIAF ‘서유록西遊錄’은 국내외 작가 13명과 함께 여행을 주제로 전시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 페스티벌은 1910년대 초 강릉 김 씨라는 이름의 여성이 대관령을 넘어 서울을 다녀온 37일간의 여정을 담은 기행문 ‘서유록’에서 영감을 받았다.
GIAF는 격동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여정을 떠난 그녀를 행사의 주제 전달자이자 안내자로 삼았으며, 강릉과 도시, 삶과 이동의 관계를 조명하고 여행의 의미를 새로 해석했다.
◆세계적 예술제가 강릉에서도 꽃피다
GIAF는 지역 예술 축제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해외 다양한 성공 사례에서 영감을 얻었다.
특히 지역 재생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세토우치국제예술제 ▲에치고츠마리아트트리엔날레 ▲얀바루아트페스티벌이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의 주목을 받았다.
먼저 세토우치국제예술제는 세토 내해의 섬을 배경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현대 미술 작품과 지역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쇠퇴한 지역을 세계적인 예술 관광지로 변모시켰다.
에치고츠마리아트트리엔날레는 지역민에게는 자부심을, 관람객에게는 존경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빈집과 창고 같은 지역의 역사적 공간을 활용해 지역민의 삶을 기록하고 재해석한 데 따른 긍정적 영향이었다.
얀바루아트페스티벌은 오키나와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보존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또한 주민이 축제의 기획과 운영에 주체적으로 참여해 공동체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이러한 성공 사례를 참고해 지역민과의 지속적인 소통과 협력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다.
2020년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시각 미술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박소희 큐레이터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했다. 일방향적 단순 후원을 넘어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경험할 수 있는 강릉 기반의 문화·예술 행사를 이끌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재단이사인 박 예술감독은 “얀바루아트페스티벌 위원회로 활동하며 작가 교류 및 다양한 방식의 협력을 준비하고 있다”며 “‘세토우치’나 ‘에치고츠마리’, ‘얀바루’와 같은 행사처럼 GIAF도 강릉 지역민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축제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제1회 GIAF는 7개 공간에서 작가 15명이 작품을 선보였다. 제2회 때는 6개 공간에서 13명의 작가가 참여해 행사를 풍성하게 채웠다.
2025년 제3회 GIAF도 한층 높은 완성도를 목표로 준비가 진행 중이다.
궁극적으로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관람객과 예술가 모두가 함께 성장하고 소통하며 의미 있는 예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축제를 지향한다.
박 예술감독은 “GIAF가 예술가에게 매력적이고 신뢰받는 플랫폼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를 주변에서 느끼고 있다”며 “관람객에게는 흥미로운 작품과 경험을 선사하고, 예술가에게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무대를 마련하는 것, 이것이 GIAF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방향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박 예술감독은 단발적이고 일시적인 미술 행사와 콘텐트의 반복적 소멸이 결국 관객과 시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콘텐트 개발 및 연구에 힘쓰고 있으며, 시민에게 보다 깊이 스며드는 쌍방향적 문화·예술 활동을 지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민속과 예술의 융합
제1회와 제2회 GIAF는 페스티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매년 개최됐지만, 내년 2025년부터는 2년마다 열리는 비엔날레로 형식이 전환됐다.
박 예술감독은 “재단은 더 긴 준비 기간을 통해 페스티벌 기획을 꼼꼼히 다듬고, 작품 공간을 구성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며 “이러한 준비 과정을 통해 내년 GIAF는 더욱 깊이 있는 예술 경험과 완성도 높은 전시를 제공할 예정이다. 어떤 작품이 어떤 공간에서 강릉의 이야기를 들려줄지 내년 3월 강릉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제3회 GIAF는 ‘에시자, 오시자’라는 제목과 함께 2025년 3월 14일부터 4월 20일까지 총 37일간 열린다. 주제는 ‘민속’이며 그중에서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인 강릉단오제를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강릉단오제는 독창적 전통과 지역민의 높은 참여가 돋보이는 민관 협력의 대표적 사례다.
이번 GIAF는 강릉단오제에 깃든 천년의 깊은 이야기와, 더불어 공동체의 역사와 개인의 삶이 서로 공명하는 지점을 조명한다. 또한 오랜 시간을 관통하는 현재-완료-진행형의 서사 구조를 탐구한다.
▲김재현 ▲서다솜 ▲안민옥 ▲윤석남 ▲이해민선 ▲이양희 ▲정연두 ▲키와림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Plastique Fantastique ▲호추니엔Ho Tzu Nyen ▲홍이현숙 ▲흐라이르 사르키시안Hrair Sarkissian까지 작가 12명이 참여해 풍부한 이야기를 전할 예정이다.
박 예술감독은 GIAF25에서 꼭 주목해야 할 작가로 정연두 작가와 김재현 작가를 소개하고 싶다고 밝혔다.
정연두 작가는 모든 단오제 행사를 비롯해 역사 및 설화와 연결된 대부분의 공간을 기획팀과 답사했다. 특히 주민센터 내 신주를 모으는 부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신주 빚기의 전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으며, 실제 단오제에 사용하는 신주 항아리를 강릉단오제위원회로부터 빌려 직접 막걸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정 작가는 지형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산불과 단오제의 기도 등 이곳에 담긴 인간의 능력과 그 영역을 넘어서는 것에 주목했다는 전언이다.
지난 2일 연세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콘서트홀에서는 정 작가의 출품작 ‘싱코페이션Syncopation’의 주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연주회가 열렸다. 임지선 작곡가의 신곡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디아스포라>’를 포함해 4채널 영상 및 설치 작품이 강릉 옥천동 웨어하우스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GIAF는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강릉을 기반으로 한 작가 발굴 공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작가의 작품 제작과 큐레이팅을 적극 지원한다.
강릉역과 창포다리에서 작품을 선보일 김재현 작가는 강릉에서 지역 문화를 체득하며 성장한 세대다.
학업을 위해 잠시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고향을 바라보며 느낀 감정과 시선을 작품에 담았다. 이를 통해 강릉이라는 도시가 개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기억 속에 자리 잡는지를 보여 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전망이다.
이번에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새로운 프로그램인 시티 도슨트City Docent와 시티 가이드City Guide도 선보인다.
관람객이 강릉이라는 도시를 거닐며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기획됐다.
시티 도슨트는 페스티벌 전시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한편 시티 가이드는 전시 장소 주변의 강릉의 역사적, 문화적 이야기를 안내한다. 단순히 예술을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 강릉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시각을 얻을 수 있다.
◆사계절 예술 도시를 꿈꾸며
GIAF는 계절마다 다른 주제를 선보이며 강릉을 예술로 물들이고 있다.
이는 초기 기획 의도에 충실한 바다. 제1회 ‘강/릉/연/구’는 초겨울에, 제2회 ‘서유록’은 가을에 개최됐다. 제3회 ‘에시자, 오시자’는 봄에 열릴 예정이다. 이후 2027년 여름에 진행될 제4회 GIAF까지 계획된 상태다.
이 같은 방향성에 확신을 얻은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재단의 활동 범위를 더 확대하고자 한다.
또한 행사나 프로그램에서 기업의 존재를 과도하게 부각하기보다 재단의 활동이 지역 사회와 관람객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접근법을 추구하고 있다.
박 이사장은 “강릉 지역 미술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피드백 중 하나는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예술 행사나 전시를 강릉에서도 경험할 수 있어 좋다는 점”이라며 “많은 분이 지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국제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수준 높은 전시를 GIAF를 통해 만나며 큰 만족감을 느끼셨다”고 밝혔다.
“파마리서치문화재단과 GIAF는 전시를 넘어 강릉이 문화·예술 도시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작가와 협업하고 국제적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강릉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지역 미술계가 정체돼 있다는 세간의 평가를 깨는 중요한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은 본사 파마리서치와 함께 복합 문화·예술 공간 구축도 강릉 안현동에 진행하고 있다.
이 공간은 ▲페스티벌 기간 외에도 전시를 상시 관람할 수 있는 예술 공간 ▲워크숍과 강연 등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교육 공간 ▲강릉에 머물며 여유롭게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머무름 공간 ▲유명 예술 작품과 자연이 어우러진 정원까지 크게 4가지 기능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앞으로 강릉을 찾는 분들이 이곳에서 새로운 예술적 경험과 강릉만의 문화적 매력을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 이사장은 지역민과 방문객 모두가 함께 소통하고 머무를 수 있는 문화·예술의 허브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7년 말에서 2028년 초에 선보일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