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신술사〉, 2025,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9분.
호추니엔(b.1976)은 싱가포르 출신으로 동남아시아의 역사, 정치, 종교 등을 심도 깊게 파고드는 작가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호추니엔은 ‘변신술사(Shapeshifters)’ 라는 주제로 작가가 직접 큐레이션한 다섯 편의 작품을 상영했다. 작가는 요괴나 스파이처럼 경계에 위치한 존재들을 통해 이야기가 생성되고 전파되며 변형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이들은 아시아 근대성이 비선형적으로 중첩되는 양상을 보여주는 렌즈로 작동하며, 파편화되고 겹쳐지고 끊임없이 다시 쓰이는 역사의 성질을 드러낸다.
정체성, 역사, 내러티브의 변주 사이 복잡한 관계를 조명하는 이번 상영작들은 호추니엔의 예술적 관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이 주목하는 주제 ‘오래된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마치 신라 가요 ‘명주가’가 후대에 강릉의 연화부인 신화로 진화했듯, 시대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새로운 방식으로 변형되고 재해석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수많은 익명의 청자와 이야기꾼을 거쳐 언제나 현재와 맞닿은 채로 여전히 생명을 이어간다. 이렇듯 관객은 다시 한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의 본질을 직접 경험했다.
– 상영작 리스트 –
1. 〈이름 없음〉, 2015, 21분 50초.
2. 〈이름〉, 2015, 17분 20초.
3. 〈서른 여섯 요괴〉, 2021, 20분.
4. 〈정보기관 한/두 곳〉, 2021, 20분.
5. 〈호랑이 한/두 마리〉, 2021, 20분.
이 작품은 제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GIAF25) 스크리닝 커미션으로 한국어 번역 및 상영되었다.
1. 〈이름 없음〉, 2015, 21분 50초.
〈이름 없음〉은 ‘라이 텍’이라는 1939년부터 1947년까지 말라야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50개 이상의 가명 중 하나인 ‘라이 텍’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프랑스와 영국의 정보기관을 위해 활동하다가 이후 일본의 헌병대(Kempeitai)와도 협력하는 삼중첩자로 변모하였다. 말라야 점령기 동안 다양한 세력 사이에서 삼중첩자 활동을 했던 그는 결국 정체가 발각되어 태국에서 암살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영화’와 ‘연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계의 주요 영화 산업 중 특히 홍콩 영화에서는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밀고자, 이중첩자, 정보원, 배신자와 같은 캐릭터들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다국적 언어를 구사하며 다수의 대상에게 충성하는 역할을 맡은 배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술의 귀재에 대한 이야기를 데투르망(detournement) 기법으로 창작된 이미지들을 통해 전달한다.
2. 〈이름〉, 2015, 17분 20초.
진 Z. 한라한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종합적인 역사를 기술하려 한 최초의 작가이자, 역사적 기록과 문학적 저술 등 다채로운 저서들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방대한 주제와 관심사는 마치 여러 명의 서로 다른 작가가 하나의 필명을 공유하며 집필한 듯한 인상을 준다. 오늘날, 그는 CIA와 연관된 유령 작가(ghost-writer)였다는 강력한 의혹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름〉은 다수의 서구 영화들 속 배우들이 글을 쓰는 장면들로 구성된다. 작품에 포함된 음성 내레이션은 한라한의 저서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며, 미국 성우들의 현실감 있는 낭독으로 한라한의 캐릭터를 묘사해 준다.
이 작품은 본래 단채널 비디오 상영과 작가가 2014년부터 수집해 온 한라한의 희소한 책들이 함께 전시되는 형태로 제작된 바 있다.
3. 〈서른 여섯 요괴〉, 2021, 20분.
〈서른 여섯 요괴〉는 일본 요괴(Yokai)와 전쟁의 관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특히 태평양 전쟁과 관련해 새롭게 등장한 이야기들을 탐색한다. 전쟁 속 대중의 두려움과 절망감의 무의식적인 분출은 요괴의 형태로 일상적 상상 속에 깊이 자리 잡게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요괴 설화 중 일부는 일본의 말라야 및 동남아시아 침략과 연관성이 있다. ‘말라야의 호랑이(Tiger of Malaya)’로 알려졌던 야마시타 도모유키(Yamashita Tomoyuki) 장군과 도적 다니 유타카(Tani Yutaka)는 각각 인간의 모습을 한 호랑이(weretiger), 추인으로 등장한다. 또한, 전통적으로 등불의 기름을 핥아 먹는 존재로 알려진 바케네코(Bakeneko), 괴물 고양이와 히마무시 뇨도(Himamushi-nyudo), 불벌레 승려는 전쟁 중 동남아시아에서 자원을 약탈하던 일본군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한다.
이처럼 직조된 요괴 설화들은 기괴함과 잔혹함을 통해 ‘자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출연진 및 크레딧6
4. 〈정보기관 한/두 곳〉, 2021, 20분.
1938년, 일본은 정보전, 심리전, 선전전에 특화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나카노 육군학교’를 설립했다. 오직 군부와 대학에서 추천받은 최우수 인재만이 입학허가를 받았으며,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자들은 ‘천재’로 간주되었다. 이후, 나카노 육군학교의 졸업생들은 1940년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한 비밀 정보기관인 ‘F 기관(F-Kikan)’의 핵심인물들이 된다.
〈정보기관 한/두 곳〉은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상을 겹쳐서 보여주며, 나카노 육군학교를 거쳐 간 스파이들의 다중적 정체성과 역사적 내러티브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한다. 등장하는 수많은 첩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어떤 이는 국가와 정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삶을 위해 또 다른 첩자가 되기도 한다.
출연진 및 크레딧7
5. 〈호랑이 한/두 마리〉, 2021, 20분.
〈호랑이 한/두 마리〉는 각각 ‘말라야의 호랑이’로 알려졌던 두 일본인에 관한 네러티브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첫 번째 인물인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1942년 싱가포르 침공 당시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을 격파하며 ‘말라야의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두 번째 인물인 다니 유타카는 ‘하리마우(Harimau), 말레이어로 호랑이’라고 불리던 말라야에서 자란 일본계 도적으로, 약자들의 편에 서서 싸운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후에 F 기관 출신 나카노 육군학교 첩자인 카모토 토시오(Kamoto Toshio)의 권유로 영국군에 맞서는 첩자가 되었다.
〈호랑이 한/두 마리〉는 ‘호랑이’의 이미지가 동아시아 미술작품에서 현대 일본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묘사되어 왔는지를 추적하며, 전쟁의 망령으로서 되살아난 호랑이의 형상을 재조명한다.
출연진 및 크레딧8
